시장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상하지 않는다_ 브라운스톤
많은 사람들이 시장이 도덕적 기준으로 보상해야 마땅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시장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상하지 않는다. 이는 하이에크 이론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해가 쉽도록 예를 들어보자. 매춘부가 종일 힘들게 청소하는 청소부보다 수입이 훨씬 더 좋다. 술만 따르는 술집 접대부가 일 년에 며칠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보다 수입이 더 많다. 도덕적 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시장의 결과에 동의하기 어렵다.
시장경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그런데 만약에 시장이 도덕적 기준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도덕적 기준으로 보상해야 할까? 내 친구 중 하나는 '무식한 강남 복부인이 자기보다 더 많이 버는 게 옳지 않고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고 나름 직장 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똑똑함 그리고 근면성을 기준으로 시장이 보상해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 가끔 신문을 읽다 보면 기자 중에도 이 친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시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시장은 어떻게 보상하는가? 보상은 노력과 재능에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 운이 작용하기도 한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수요 공급으로 작동한다. 도덕적 기준은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거래 상대방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오로지 가격만 맞으면 거래가 되는 것이다.
시장이 비정한가? 아니다. 하이에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시장이 그렇게 작동하기에 우리 세상은 조화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인은 이교도에 비해서 기독교인이 집을 우선 장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을 수 있다.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도 각자 그러한 종교적 기준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종교적 기준으로 시장이 주택을 배급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폭력으로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시장은 돈이란 수단을 통해서 각자의 종교나 도덕적 기준과 상관없이 평화롭게 물자를 교환하고 거래하는 곳이다. 중세 시대 기독교인은 아랍어로 '신은 하나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화를 이슬람교도로부터 받았고 이슬람교도는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그려진 금화를 받았고 통용했다.
그런데도 대중은 각자 자기가 믿는 도덕적 잣대를 기준으로 시장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도대체 누가 도덕적 기준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시장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장경제에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어리석음은 부디 벗어나길 바란다.
왜 사람들은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가
하이에크는 자신의 저서 '노예의 길'에서 대중은 노예로 가는 길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아주 쉽게 설명해 보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읽지는 않았어도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은 이렇다. 인간은 자유를 얻었지만 고독과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고독과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은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이해하기 쉽도록 부동산을 예로 들어보자. 향후 집값이 오를지 내릴지, 지금 집을 사야 하는 건지 아닌지.... 지금 사면 상투를 잡고 손해를 보는 게 아닌지 너무 불안하다. 부동산을 공부할 틈도 없고 공부는 재미가 없고 힘들다. 누군가가 대신 정답을 가르쳐 주면 좋겠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대중은 구루를 선택하고 따른다. 그런데 아뿔싸! 대중이 이런 식으로 선택한 구루가 폭락론자 선 모 씨였다. 그래서 많이 망했다.
또 어떤 대중은 집값이 급변동되니 정부가 집값을 안정시켜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정부가 반시장적 규제를 하라고 요구한다. 더 나가서 정부가 집을 배급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나라가 바로 공산국가다. 이런 정책으로 성공한 공산국가가 지구상 어디에 있던가?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는 또 다른 선택은 종교다. 종교의 세계에는 불확실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종교는 덤으로 현재의 괴로움도 내세에 보상받을 것이란 위로도 준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국가나 구루나 종교로 도피한다. 그래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자유를 버리고 노예의 길을 선택할까? 자유는 경쟁이 기본이고, 노력이 기본이고, 책임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경쟁하기 싫고 노력하기도 싫고 책임지기도 싫은 미성숙한 대중이 쉽게 원하는 게 무엇일까? 이럴 때 달콤하게 등장하는 정치 세력은 파시스트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자다. 이들은 대중에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인다. 그냥 모든 건 정부가 다 해준다고 약속한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불안한 대중은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노예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대중이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야 한다. 어린애처럼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고 경쟁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부의 인문학_ 브라운스톤